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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여 질 수 없고, 보여질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이태량의 이번 개인전은 그동안 존재와 사고 (EXISTENCE and THOUGHT)라는 주제로 지속적인 작업을 해오고 있는 작가의 작품 중에서 갤러리스트가 낙점한 작품들을 모아 전시하는 것으로 기존의 회고전과는 다른 맥락을 가진다. Gallery Marie Selection (갤러리 마리 셀렉션)이라 부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일선에 있는 갤러리가 작가의 작품에 대해 가지는 개별적 관점이 드러나는 것으로, 이태량의 작품을 대중과 관람객에게 전달하고 싶은 갤러리 마리 고유의 층위가 드러난다.
예술의 형식_명제 형식을 취할 것
이태량은 진즉부터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에서 그림과 언어, 그리고 실재 사이에 성립하는
‘명제적 형식’을 자신의 작업으로 가져왔다. 논리적 규칙에 의해 구조적 동일성으로 실재와 명제는 비교되고 이로써 명제의 참과 거짓을 결정할 기준을 갖게 된다. 사실과 일치할 때는 참이 되고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때 거짓이 된다. 참 또는 거짓으로 분류될 수 있고, 그럴 수 있을 때 명제는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여기서 그의 명제형식이란 ‘참’ 명제와 같이 ‘좋은 작업을 해야 한다’는 시도가 아니다. 화면 안에 그려진 것에서는 어떤 사태와 대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을 찾기 어렵다. 숫자와 기호, 선들과 채색, 그리고 여백 공간이 날것으로 낯설게 다가온다. 이쯤 되면 그의 모든 작품의 제목인 ‘명제형식’은 반어적이거나 역설적임을 눈치채야 한다. 마치 ‘숫자 7은 초록색이다‘처럼 거짓이라기보다는 그에 대응할 만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무의미한(nonsense) 명제가 되는 것처럼 그의 명제형식도 무의미하다.
그러나 과학적으로는 무의미하지만 우리 삶에 의미가 있는 것들은 단지 과학적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수학과 과학의 기준과 언어의 한계 너머에 있는 것들, 바로 윤리학과 미학의 명제들이 그것이다. 이태량의 명제형식이 무의미하지만 무의미하지 않은 이유이다.
예술의 효용_ 타고 올라간 사다리는 던져 버릴 것
현실이 이데아의 모방이라 여겼던 시대 이후 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회화는 평면 안에 어떻게든 실재와 대상을 사실적으로 욱여 넣기 위해 음영과 원근법, 투시기법 등 과학적 방법을 동원하여 재현에 열을 올렸다. 카메라가 나와 사진이 재현의 왕좌를 차지하자 회화는 새로운 것을 찾아야 했다.
화면의 극적인 강조점과 명암대비를 제거하면서 원근법을 부정하고 전면 균질의 화면을 구성하기 시작했고 순수 추상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것들은 극복되어야만 했고 회화와 예술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동시대미술 안에서 이태량의 추상은 아리비아 숫자, 알파벳, 크로스, 도형, 인체 등 갖가지 조형 기호들이 이합 집산을 하며 행위의 동어반복을 계속한다. 이러한 동어 반복은 현실의 그림인 뜻 있는 명제들과 본질적으로 상이하다. 그의 동어 반복은 현실의 그림이 아니다. 명제가 무언가를 말하는 반면에 동어반복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이 아니라고 해서 헛소리와 같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말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를 의미하며 보여지는 것으로 모든 가능한 상황을 허용한다.
“ 내 그림은 중요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림 밖의 모든 것들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태량은 자신의 그림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고 보여지는 것으로써 보여지지 않는 세계를 인식하게 하는 사다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의 그림을 통해 말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보고 그것들을 딛고, 그것들을 넘어서서 올라갔을 때, 결국 그것들이 넌센스임을 인지하게 되기를 자처한다.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 사다리는 들고 가기에 불편한 장애이다. 그렇기에 과감하게 사다리는 내던져 버려야 한다. 쇼펜하우어로 부터 차용하여 비트겐슈타인이 인용한 이 비유에서 고대로부터 현대 미술에 오기까지의 부단히 내던져진 사다리의 자취를 보게 된다. 이제 이태량의 사다리를 딛고 올라가 내던질 준비가 되었는가?
예술의 흔적 _ 침묵의 파편으로 드러낼 것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자연의 난제들과 속도에 이끌리다 원심에서 분리될 것만 같은 작금에 자유와 휴식을 선물하고 싶은 심정으로 이번 전시의 출품작을 셀렉했다.
“실로 언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드러난다. 그것이 바로 신비스러운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세계를 조망(Übersicht)하고 인식하는 삶으로서 사유의 길에서 마치 침묵의 파편들인양 드러낸 이태량의 민낯같은 조작물을 대면할 시간이다.
갤러리마리 아트디렉터 차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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